반복에는 이론이 있다
AI를 둘러싼 지금의 과열은 역사에 처음 나타난 모양이 아니다. 철도와 전기, 자동차와 인터넷까지, 새 기술이 올 때마다 폭발적 투자와 거품, 붕괴가 차례로 이어졌다. 이 반복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 카를로타 페레스다.
페레스는 2002년 저서에서 지난 250년의 기술 혁명이 모두 비슷한 생애주기를 그렸다고 정리했다. 산업혁명(1771), 증기와 철도(1829), 철강과 전기(1875), 석유와 자동차·대량생산(1908), 정보통신(1971). 다섯 번의 물결이 각각 반세기에 걸쳐 같은 모양으로 펼쳐졌다. 페레스는 이것을 우연이 겹친 결과로 보지 않았다. 국면마다 자본의 성격이 바뀌면서 같은 모양이 반복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닷컴 역시 같은 패턴의 한 사례였다는 것은 닷컴의 공급사슬은 AI 버블의 거울에서 따로 확인했다.
설치기의 거품은 기능이다
각 물결은 두 시기로 나뉜다. 앞쪽은 설치기다. 새 기술이 등장하면 금융자본이 몰려들어 인프라를 과도하게 깔며 거품을 만들고, 그 거품은 전환점에서 무너진다. 뒤쪽은 배치기다. 생산자본이 주도권을 잡고, 깔려 있던 인프라가 사회 전체로 퍼지면서 생산성의 황금기가 열린다.
페레스의 핵심 통찰은 설치기의 거품이 비정상이 아니라 나름의 기능을 한다는 데 있다. 운하·철도·광섬유 같은 인프라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까는 일은 냉철한 계산만으로는 벌어지지 않는다. 그 과잉을 떠받치는 것이 금융의 광기다. 붕괴가 오면 투기는 씻겨 나가지만 물리적 인프라는 남는다. 설치기의 광기가 배치기의 인프라를 남긴다. 거품은 인프라가 일찍 도착하도록 미리 치르는 통행료에 가깝다.
다크 파이버는 붕괴 뒤에 제값을 했다
닷컴 시절 깔아 놓고 놀리던 광섬유, 이른바 다크 파이버는 사라지지 않았다. 2000년대 후반 유튜브와 넷플릭스, 클라우드가 그 회선에 불을 켜서 썼다. 거품은 꺼졌지만 인프라는 배치기의 연료가 됐다. 같은 설비가 설치기에는 과잉이었고 배치기에는 유산이었던 셈이다.
위키의 실측은 설치기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AI는 이 주기의 어디에 서 있나. 정보통신 혁명의 배치기 절정일 수도 있고, 여섯 번째 패러다임의 설치기 한복판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 위키가 추적하는 기업(노드)들의 실측 수익률은 지금이 설치기 쪽에 가깝다고 가리킨다.
첫째, 상승이 진앙에서 시작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엔비디아는 2023년 +239%, 2024년 +171% 올랐다. 그런데 사슬 아래로 갈수록 숫자는 더 커졌다. 메모리의 키옥시아가 2025년 +1082% 올랐고, 난야테크는 2024년 −56%에서 이듬해 +985%로 돌아섰다. 기판에서 AI 병목을 쥔 이비덴도 2025년 +261%, 2026년 +192% 올랐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하다. 진앙인 엔비디아가 2025년 +38.9%, 2026년 +5.1%로 둔화하는 사이, 아래층의 메모리와 기판이 그해 정점을 찍었다. 상승의 무게가 위에서 아래로 옮겨간 것이다. 세 자릿수 수익률이 상단에서 하단으로 차례로 옮겨간 이 흐름(AI 사이클은 가치사슬을 따라 전파됐는가)은 금융자본이 생산보다 앞서 달리는 설치기의 전형이다.
둘째, 자본이 회로를 이룬다. 엔비디아가 고객과 공급사에 동시에 투자하는 회로형 금융은, 페레스의 틀에서 보면 금융자본이 생산자본을 앞지른 설치기의 전형적 징후다. 배치기의 차분한 확산과는 거리가 멀다.
지도는 거품과 인프라를 미리 가른다
투자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 둘을 미리 갈라 보는 눈이다. 전환점은 투기의 거품과 인프라의 실체를 갈라낸다. 지금 과잉으로 깔리는 연산·전력·기판·데이터센터는, 설령 한 번의 붕괴가 오더라도 다크 파이버처럼 남아 배치기를 떠받칠 물리적 유산이다. 밸류에이션만 보면 둘은 똑같이 오르고 똑같이 비싸 보인다. 그러나 하나는 거품이 꺼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른 하나는 거품이 꺼진 뒤에도 땅 위에 남는다.
가치사슬 지도의 쓸모가 여기에 있다. 지도가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지금이 어느 국면인가. 그 국면을 읽는 재료가 리레이팅(재평가)이 어느 층까지 내려왔는가 하는 위키의 실측이다. 리레이팅이 진앙에서 사슬 끝까지 번졌다면 설치기는 정점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어느 노드가 거품과 함께 사라질 금융자본의 영역이고 어느 노드가 붕괴 뒤에도 남을 인프라인지를, 사슬을 따라 미리 구분해 둘 수 있다.
검증 결론
다섯 번의 물결이 같은 모양이었고, AI의 실측도 설치기 쪽으로 기운다. 상단에서 하단으로 이어진 세 자릿수 수익률과 회로형 금융이 그 근거다. 설치기의 광기가 배치기의 인프라를 남긴다는 페레스의 명제는 적어도 지금 국면에는 들어맞는다. 지도의 값어치는 붕괴가 오기 전에, 사라질 거품과 남을 인프라를 미리 갈라 두는 데 있다.
여기까지가 사이클, 곧 시간의 축이다. 그런데 축은 하나가 아니다. 같은 사슬이 시간에 더해 공간을 따라서도 갈라지고, 제재와 국경이 같은 밸류체인을 두 벌로 복제한다. 중국의 병렬 생태계에서 그 공간의 축을 연다.